* 예술과뛰놀다
영화,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문화 컨텐츠를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하는 시간.
다양한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수업.
이번주 예술과뛰놀다는 영화 ‘흥부 : 글로 세상을 바꾼자’ 입니다!
줄거리
“내가 쓴 흥부전 궁금하지 않소”
아무도 몰랐던 형제, 흥부 – 놀부
양반들의 권력 다툼으로 백성들의 삶이 날로 피폐해져 가던 조선 헌종 14년.
붓 하나로 조선 팔도를 들썩이게 만든 천재작가 ‘흥부’는
어릴 적 홍경래의 난으로 헤어진 형 ‘놀부’를 찾기 위해 글로써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 한다.
모두가 알고 있는 형제, 조혁 – 조항리
수소문 끝에 형의 소식을 알고 있다는 ‘조혁’을 만나게 된 ‘흥부’는
모 잃은 아이들을 돌보며 백성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존경 받는 ‘조혁’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한편, 백성을 생각하는 동생 ‘조혁’과 달리
권세에 눈이 먼 형 ‘조항리’의 야욕을 목격한 ‘흥부’는 전혀 다른 이 두 형제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탄생한 ‘흥부전’은 순식간에 조선 전역에 퍼져나가고,
이를 지켜보던 ‘조항리’는 그를 이용해 조선을 삼킬 음모를 계획하는데…
우리나라 고전소설 <흥부전>
《흥부전》은 우리나라의 고전 소설이다.
조선 시대에 지어진 한글 소설이며 판소리계 소설로 작자와 정확한 창작 시기는 알 수 없다.
욕심 많은 형 놀부와 가난하지만 착한 동생 흥부의 이야기로, 해학과 풍자가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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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흥부전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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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경상도와 전라도가 맞닿은 어느 고을에 형제가 살았다. 동생 흥부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제 형제를 사랑으로 대했다.
하지만 형 놀부는 욕심이 많아 허구한 날 심술을 부려 대니 한 부모에게서 났지만 성품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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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부는 제 앞가림도 못하는 흥부가 항상 못마땅했다. 집안일은 안하고 남 일에만 발 벗고 나섰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놀부는 생트집을 잡아 흥부네 식구를 쫓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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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난 흥부네는 고향 근처 복덕촌에 자리잡고 살았다. 내외가 밤낮으로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도 돈 한 푼 모으지 못했다.
그런데 자식만은 부자여서 한 번에 하나만 낳는 게 아니라 둘씩, 셋씩 낳아 아들만 조르르 스물아홉이었다.
하루는 아이들이 음식 타령을 하며 생떼를 써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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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는 곡식이라도 빌릴 셈으로 관가에 갔다가 죄 지은 사람 대신 곤장을 맞고 돈을 받는 매품 파는 일을 맡게 되었다.
흥부는 아내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매품을 팔러 갔는데, 어찌된 일인지 벌써 다른 이가 매를 맞고 돈을 받아 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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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돈 벌 일이었던 매품도 못 팔게 되자, 결국 흥부는 곡식을 얻으러 커다란 자루를 짊어지고 형 놀부의 집으로 향한다.
놀부는 흥부가 살려 달라며 먹을 것을 청하자 몽둥이찜질을 했다.
흥부가 안채로 도망가자 놀부 아내는 흥부를 나무라며 밥 주걱으로 흥부의 뺨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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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 내외는 서러워 서로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때마침 웬 스님이 흥부네 집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흥부네 사정을 들은 스님은 좋은 집터를 하나 잡아 주고 사라졌다.
흥부는 스님이 잡아 준 터에 수숫대로 집을 짖고 살았는데, 그 다음부터 흥부네 살림이 차차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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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봄이 되자, 흥부네 집 처마에 제비 한 쌍이 날아들더니 집을 짓고 알을 낳아 새끼를 쳤다.
그러던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들어와 제비 새끼들을 잡아먹는 것을 본 흥부가 서둘러 구렁이를 쫓아냈으나 겨우 제비 새끼 하나만 구할 수 있었다.
흥부는 혼자 남은 제비가 가여워서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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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제비가 날기 연습을 하다 떨어져 그만 발목이 뚝 부러지고 말았다.
흥부는 명태 껍질과 명주실을 구해다가 부러진 다리를 친친 동여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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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어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 제비 왕에게 사연을 이야기하자, ‘보은표’ 라는 박씨 하나를 흥부에게 갖다 주어 은혜를 갚으라 했다.
다음 해 봄이 되어 다시 흥부의 집을 찾은 제비는 흥부 앞에 박씨를 떨어뜨려 주었다.
흥부가 뒤뜰 볕 잘 드는 곳에 땅을 파고 거름을 뿌린 뒤 박씨를 심으니 순이 나고 넝쿨이 되어 쭉쭉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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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 추석이 되어 온갖 음식을 지지는 고소한 냄새가 사방에 진동을 했다. 하지만 흥부네 집은 서늘한 기운만 가득했다.
흥부가 박 속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마당 가운데에 박을 놓고 타기 시작하자, 자식 스물아홉이 구경을 하러 좌우로 쭉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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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 어찌나 큰지 부부가 마주 서서 노래를 하며 톱질을 했다.
박을 쪼개니 그 안에서 쌀 나오는 쌀궤, 돈 나오는 돈궤, 귀한 약과 색색의 비단이 나오고, 급기야는 사람들이 몰려나와 대궐 같은 기와집 수백 간을 지어 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없는 것 없이 다 갖춰져 있었다. 그렇게 흥부는 하루아침에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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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흥부가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놀부는 샘이 나서 슬슬 배가 아파 왔다. 그래서 그길로 흥부네 집을 찾아갔다.
놀부는 흥부에게 좋은 대접을 받고 부자가 된 사연을 듣고 나서 돈궤와 화초장을 얻어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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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놀부가 집에 가 돈궤를 여니 그 안에 돈은커녕 구렁이가 들어앉아 있었다.
그래서 돈궤를 흥부네 집으로 보냈는데 흥부가 열어 보니 돈이 가득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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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부는 흥부가 제비 다리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며 저도 제비를 길러 보기로 했다.
날이면 날마다 밖으로 나가 제비 몰기를 한 끝에 드디어 어느 날 제비 한 쌍이 놀부 집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알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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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부는 아무리 기다려도 제비 새끼가 떨어지지 않자,
직접 구렁이 노릇을 하며 제비 다리를 똑 부러뜨리고서는 제비 다리에 민어 껍질을 친친 감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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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어 강남으로 돌아간 제비가 놀부의 일을 제비 왕에게 고하자,
제비 왕은 크게 노여워하며 박씨 하나를 놀부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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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봄, 놀부는 박씨를 받자 일 년 농사에 쓸 거름을 몽땅 가져다 붓고 박씨를 심었다.
놀부의 바람대로 커다란 박이 여섯 통 열렸다. 놀부는 일꾼을 불러다가 톱질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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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박이 열릴 때마다 빚 받으러 온 노인, 놀부네 안방에 묘를 쓰겠다는 상제, 거지떼, 사당패 들이 나오더니
갖가지 이유로 놀부에게서 돈을 받아 돌아갔다.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될 참인데도 놀부는 마지막 박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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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장군이 나와 놀부의 죄를 일러 주며 목을 부러뜨리겠다고 엄포를 놓고, 놀부는 기절을 하고 만다.
흥부가 그때 마침 소식을 전해 듣고 나타나 장군 앞에 엎드려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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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장군은 흥부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하여 돌아갔다. 놀부가 깨어나 보니 그 많던 재산이 몽땅 사라지고 없었다.
놀부 부부는 흥부에게 용서를 빌었다.
놀부는 그날부터 좋은 사람이 되었고 흥부는 형을 따뜻하게 위로하며 가진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었다.
그 뒤로 형제는 지난 일은 모두 잊고 한 평생을 정답게 잘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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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흥부전의 등장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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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
선량하고 순박한 인물로, 조선 후기의 가난하고 소외된 서민층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도덕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착한 행실로 주위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현실 감각이 부족하고 경제 관념이 투철하지 못해 무능한 가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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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부
부도덕하고 몰인정하며 심술궂은 인물이다. 자신의 이익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물이지만,
경제 활동에 있어서는 성실하고 끈기 있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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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 부인
흥부의 아내로, 여리고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다. 생활고에 힘들어하고 자식들이 배를 곯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일방적으로 남편을 원망하거나 몰아세우지 않고 오히려 위로하며 다독이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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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부 부인
놀부의 아내로, 남편 못지않은 심술꾼이며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돈 없고 가난한 흥부를 무시하며 함부로 대하는 등 흥부의 비참한 상황을 더욱 부각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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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이 작품에서 주요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다. 흥부의 가난을 해결하고
놀부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는 등 작품 내 갈등 해소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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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흥부전 파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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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이 세상을 바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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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의 배경인 조선 후기는 새로운 농업 방식의 등장, 상공업의 발달, 조세 제도의 개혁 등 경제 변화가 많은 시기였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경제력이 향상되어 부를 쌓은 농민들이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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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관직을 얻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몰락한 양반들도 생겨났다.
그래서 부를 쌓은 농민은 돈으로 신분 상승을 하기도 하고, 몰락한 양반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품을 팔기도 했다.
기존의 조선 사회가 신분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면, 조선 후기는 점점 돈이 힘이 되고 권력이 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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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양반층과 부농들은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소작농에게 빌려 주고
그에 대한 대가로 수확한 작물의 일부를 거두어들여 시장에 내다 팔아 이득을 얻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이렇게 불린 돈으로 다시 토지를 사서 쉽게 재산을 불렸다. 하지만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은 점점 더 궁핍해졌다.
그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화전민, 유랑민이 되어 떠돌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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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 변화에서 주목할 것 중 또 다른 하나는 화폐의 유통이다.
국내 상업과 대외 무역이 활기를 더해 감에 따라 금속 화폐가 필요해지자 숙종 4년에 ‘상평통보’라는 화폐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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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많은 화폐가 발행되어 17세기 말에는 전국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른다.
화폐의 유통은 물건을 사고파는 교환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양반 지배층이 재산을 늘리거나 고리대금업을 할 목적으로 화폐를 창고에 쌓아 두어 시중에 화폐 유통량이 부족해지기도 했다.
이럴 경우 정작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 돈을 구하지 못해 생활은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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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에는 이러한 조선 후기 백성들의 생활 모습과 경제 관념, 사회 구조의 모순 등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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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산을 맏아들에게 물려주는 상속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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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만 해도 재산 상속은 아들과 딸, 맏아들과 그 외 자녀의 구별 없이 균등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속 제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변하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지배층에 대한 신뢰를 잃은 백성들은 신분 제도가 갖고 있는 모순을 깨닫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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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불안해진 양반 지배층은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신분 제도를 중심으로
상하 계층의 역할과 경계를 분명히 하는 유교 윤리에 바탕을 둔 통치 질서를 강화해 나간다. 그래서 예법과 제사를 훨씬 강조하게 되었고,
17세기 이후에는 딸은 제사를 지낼 수 없었고 아들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맏아들에게 상속이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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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가 놀부에게 쫓겨나며 빈털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흥부가 맏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이미 잘사는 놀부와 못사는 흥부 같이 경제적 격차가 심한 형제가 많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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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웃음으로 눈물을 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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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전》은 흥부의 비참하고 어려운 상황을 다룬 장면에서조차 익살과 웃음이 넘쳐 난다.
흥부의 가난은 당시의 이야기꾼이나 소리꾼에 의해 슬프고 우울한 것이 아닌 과장되고 익살스런 모습으로 유쾌하게 만들어졌다.
이러한 웃음은 절박한 상황을 벗어나 보려는 백성들의 건강한 삶의 의지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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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더라도 제비가 도움을 준다는 초현실적 방법으로
부자가 된 흥부의 이야기는 부를 꿈꾸는 수많은 백성들을 대리 만족시켰다.
또 놀부가 호되게 매운맛을 볼 때면 억눌린 마음을 시원하게 풀며 카타르시스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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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사람들은 《흥부전》을 통해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통쾌함을 느끼고, 팍팍한 삶을 위로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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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남 갔던 제비야, 그곳이 어디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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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흥부전》 중 <제비 노정기>는 강남에서 박씨를 물고 흥부네 집까지 오는 제비의 여정을 차례로 담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흥부전》에 나오는 강남이 중국 양쯔 강 이남의 화남 지방일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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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기 이후 중국의 도시는 화북 지방보다 화중과 화남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해 왔습니다.
특히 화남 지방은 따뜻한 기후와 해상 무역이 가능한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나라 선비들에게도 화남 지방은 이상향으로 손꼽혀 온 도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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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은 풍족함을 상징하는 희망의 공간
제비는 따뜻한 곳을 찾아 옮겨 다니는 여름 철새입니다. 이런 제비의 습성을 떠올려 보면
강남은 제비가 찾아가는 따뜻한 곳, 풍요로운 곳이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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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흥부전》에서 묘사되는 강남은 여러 곳으로 흩어졌던 제비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제비들의 왕국으로 그려집니다.
흥부가 구해 준 제비는 제비 왕에게 그간의 상황을 보고하고 박씨를 하나 받게 되는데,
그 박씨로 인해 흥부는 가난을 해결하고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제비의 왕국인 강남은 보은과 풍족함을 상징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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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은 물의 건너편에 있는 신의 세계
강남은 ‘물의 건너편’을 뜻하기도 합니다. 물이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다시 태어남, 깨끗함, 신비로움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흔히 이승과 저승 사이에 강이 흘러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로 나뉜다고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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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강의 건너편은 죽음과 부활, 탄생을 모두 포함하는 신의 공간이라고 보았습니다.
제비가 물어 온 박씨의 신비한 능력을 생각하면, 강남의 의미를 초월적인 힘을 갖고 있는 신의 세계로 볼 수도 있습니다.
토크톡톡
예술과 뛰놀다 수업 후 각자의 생각을 토론하며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고,
다양한 관점을 통해 시각을 넓히는 시간.
Talk &listening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는 수업.
(스포일러 주의)
1.글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
H : 악영향으로는 악플이나 루머로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쇼핑몰 사이트나 펜션, 게스트하우스 등 후기를 글로 쓰면 정보도 나눌 수 있고 판매처나 숙박제공 업소에게도 사업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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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영화에서 나왔듯이 글 때문에 오해나 생각이 바뀔 수 있다.
예를 들어 서로 싸운 경우 장문의 편지나 사과문으로 서로의 마음을 풀 수 있듯이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 같다.
부정적으로는 글로는 사람의 감정을 완벽히 표현할 수 없어서(표정, 말투 등) 오히려 오해가 생길 수 있는 것 같다.
2.고전 소설 흥부전을 다른 시각에서 풀어냈습니다.
영화와는 다른 또 다른 시각에서 흥부전을 감상하고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았는지 그 내용을 적어봅시다.
H : 제 3자의 입장(시대밖의 인물, 외국인)에서 보았을 때, 시대 상황을 정확히 모르니까
‘아,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고위 관직들도 많구나, 백성들이 많이 힘들겠다.’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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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흥부전을 본 백성들은 재미있게 보았을 것이다. 그때당시는 흥부전같은 소설이 유행했을 것 같다.
영화에서 나왔듯이 사람들이 뜨겁게 반응하고 소설이라도 그 내용에 빠져들이 같이 분노하고 하는 것 같았다.
흥부전을 읽은 고위관직의 입장은 잘 모르겠지만 상황에 따라 반응이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다른 작가들의 입장에서는 흥부전이 뜨니까 질투나 났지 않았을까 싶다.
3.흥부전의 배경인 조선 후기의 특징
H : 사회 전반적으로 산업이 융성하고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유학자들의 학문과 문학활동이 더욱 활발해진 시기이다.
여성의 학문과 문학 활동에 대해서도 조금 더 개방적이게 되었다.
조선 후기 유명한 예술가로는 김만중(구운몽), 신윤복(미인도)이 있다.
농업 발달로 농민층이 부유해지고 가난한 양반들이 늘면서 신분층에 혼란이 왔다.
상평통보가 나오고 붕당 정치의 폐단으로 탕평책이 실시되고 세도 정치를 했다.
L : 산업발달, 문화 발달, 작품활동 활발, 실학 성행, 학문 발달, 유능한 학자 배출, 정치적 혼란, 농업발달, 신분제도의 변화
→ 조선 후기는 사회 전반적으로 산업이 융성하고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 유학자들의 학문과 문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진 시기이다.
여성의 학문과 문학 활동에 대해서도 좀 더 개방적이며 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이 시기에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여성한시 작가가 등장해 다수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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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김만중 :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을 제작
양란을 겪은 선민(先民)들은 <임진록>을 위시한 <유충렬전> <조웅전> 등 군담소설을 즐겨 썼고
<옥루몽> <옥련몽> 등 몽자류 소설이 나오게 되었다.
또다시 <토끼전> <두껍전> <콩쥐팥쥐> <흥부전> <심청전> 등 동화·전설 등 설화를 소설화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평민 사이에서 유행했는데, 〈새타령〉, 〈육자배기〉, 〈사랑가〉, 〈수심가〉 등이 있다.
– 화가
김홍도 : 산수·도선·인물·풍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후대에 이름을 크게 떨쳤다.
신윤복 : 대표작 《미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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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정치, 사회적 폐단이 크게 드러났다. 이것을 시정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개혁이 시작되었다.
세제를 가볍게 하고, 군역제도를 고쳤다. 훈련도감 등 5군영을 설치하여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이어서 영조와 정조 때에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붕당정치의 폐단을 시정하였다. 이러한 개혁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였다.
경작면적이 증대되어 농업생산력도 늘어나서 일부 농민들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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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과 수공업도 발달하였다. 산업의 발달로 상공업의 중심지에는 인구가 늘고 도시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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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여러 가지 사회모순이 나타나자 이것을 개혁하기 위하여 실학이 일어났다.
실학자들은 민생의 안정과 부강한 나라를 이룩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리하여 높은 학문적 성과를 거두었다.
[실학]은 이론과 관념론에 치우치던 성리학과는 달리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역사와 현실을 밝히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학, 역사학, 지리학, 자연과학, 농학 등 여러 방면에 걸친 광범한 연구를 하였다.
실학은 영조, 정조, 시대에 융성하였으며, 정조는 규장각이라는 학문연구소에 실학자들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유용한 서적이 편찬되었으며, 정약용과 같은 큰 학자들이 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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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들어와 어린 왕들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외척세력들이 왕권을 압도하고 이른바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세도정치에 의한 권력의 집중은 정치의 문란을 가져왔으며, 그 피해는 농민에게 파급되었다.
여러 가지 국가의 시책에도 불구하고 생활에 쪼들린 농민들은 유랑하여 유민이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민란이 빈발하였다.
홍경래의 난은 지방에 대한 차별대우에 분격하여 일어났으며, 그 뒤에 일어난 진주민란의 경우는 포악한 관리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에 계속된 민란은 세도정치에 의해 병든 양반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에 와 이 민중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천주교가 서울을 중심으로 전파되고 동학은 농촌 속에서 자라났다.
유교의 윤리와 신분제를 배격하고 조선의 현실을 부정하는 천주교와 동학의 교세가 번창함에 따라 이를 꺾기위해 탄압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도시와 농촌에 급속히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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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지주제 변동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 변동과 그 발전은 우선 농업부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이앙법의 발달은 농민 경제의 향상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조선 전기의 벼농사는 한전이나 수전을 막론하고 볍씨를 뿌린 땅에서 그대로 키우는 직파법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이앙농법으로 생산량을 증대시켜 농가 경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또 시비법의 개발과 농기구의 개량과 더불어 일부 농민들은 논농사보다 인삼, 고추, 담배 등의 경작에 주력하였으며
특히 인삼은 중국으로의 수출로 상업적 농업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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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업·수공업·광업의 발달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관청의 수요품을 조달하는 상인인 공인의 대두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촉진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대외무역과 국내상업이 활기를 더해감에 따라 금속화폐가 요구되어 숙종 4년 상평통보를 주조한 이래 많은 화폐가 발행되어
17세기 말에는 전국적으로 유통되기에 이르렀다.
수공업 제품의 유통 및 수요 증가는 그 원료 생산을 촉진시켜 광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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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반층·농민층의 분해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상품·화폐경제의 진전 등 조선 후기의 사회 변동은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신분질서를 붕괴시켜 나아갔다.
지배적인 사회집단인 양반층도 정권에 참여하고 있는 집권양반층과 지방의 토호세력으로 전락된 토반
그리고 서울과 지방에서 이미 오래전 몰락한 잔반 등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한편 토지 경영의 변화와 농업 기술의 발달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는 신분상의 변화를 가속화시켜
권세있는 일부 양반·관료층에 의한 민전의 겸영이 심해지고 지주층의 땅이 확대되어 토지를 상실한 농민이 많아진 데다가
17·18세기를 통해 인구가 크게 증가함으로써 농민층의 분해를 더욱 촉진했다.
또한 서민지주가 성장하였으며 농업 노동자층도 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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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노비제의 붕괴
신분적으로 가장 낮은 처지에 있었던 노비계층도 그 신분 해방의 길이 넓어져감에 따라 그 신분 세습법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조선 후기에 들어 정부의 각급 기관은 예하의 노비를 사실상 부지할 수 없었으므로
오히려 이들을 양인으로 만들어 군포를 받는 것이 세수입을 늘리는 길임을 깨닫게된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세도정치의 반동이 곧 나타났으나 결국 개항 후 1886년에 노비의 신분세습제가 폐지되고
1894년의 갑오경장에 와서 모든 공·사노비가 법제적으로 노비신분에서 해방되었다.
4.조선 후기의 모습과 현대 사회의 모습을 비교하여 봅시다.
H : 조선 후기에는 농업의 발달로 신분층이 무너진다고 한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상업이나 과학의 발달로 모든 사람들이 편리함을 누린다.
그래도 여전히 못 사는 사람들은 못 살고 정치인 중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똑같은 것 같다.
다만 조선 후기에는 신분때문에 고위 관직들이 강압적으로 나왔고, 현대 사회에서는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하는 척하며 이익을 챙기는 모습이 다른 것 같다.
L : 조선시대 후기 상황은 붕당정치를 하면서 권력 다툼이 심했고 이 부분이 영화에서도 나왔다.
자금 현대 사회가 조금 더 나아진 점은 있지만 자신들의 이익때문에 부정적인 일을 하는 것은 조선후기와 다를바없는것 같다.
그때 당시에는 농업이 발달했고 이제는 산업이 발달한 것이 다른 점인 것 같다.
5.헌종에 대해 알아봅시다.
H : 조선 24대 왕. 8세에 즉위하여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하였다.
인동 김씨와 풍양 조씨 세력이 대립을 이루었는데, 풍양 조씨가 집권을 하다가 조만영이 죽고 다시 안동김씨에게로 그 힘이 넘어갔다.
천주교 학살로 인해 민심의 동요가 있었고 국정의 혼란으로 민생고가 더욱 가중되었다.
글씨에 능하였다.
L :24대 왕으로 순종이 사망한 뒤 8살 때 왕위에 올랐다.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 조선 제24대 왕. 재위 1834∼1849. 본관은 전주이다. 이름은 환이다. 순조의 손자이다. 익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정왕후이다.
1830년(순조 30)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834년순조가 죽자 이 해 8세의 어린 나이로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37년(헌종 3) 3월 새로 등장한 외척 풍양조씨 세력이 우세해, 순조 때부터 정권을 전횡해 온 안동김씨 세력을 물리치고 한동안 세도를 잡았다.
그러나 풍양조씨 내부의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김씨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어 1841년 비로소 친정의 길이 열렸으나
세도정치의 여파인 과거제도 및 국가 재정의 기본이 되는 삼정의 문란 등으로 국정이 혼란해졌다.
재위 15년 중 9년에 걸쳐 수재가 발생하여 민생고가 가시지 않았다.
1836년에는 남응중, 1844년에는 이원덕·민진용 등의 모반사건이 일어나고, 1848년부터는 많은 이양선이 출몰해 행패가 심해 민심이 어수선하였다.
순조 때의 천주교 탄압정책을 이어받아 1839년에 주교 앵베르, 신부 모방과 샤스탕을 비롯하여 많은 신자를 학살했다(기해박해).
이어 천주교인을 적발하기 위하여 오가작통법을 실시하고, 1846년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을 처형하였다.
6.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H : 일단 상대를 먼저 알아야한다. 상대가 필요한 조건을 맞춰주면서 진심어린 말로 부탁을 한다면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작가한테는 글 쓸 공간을, 작고가에겐 연습실을 제공하고 같이 일을 하자고 한다면 할 것이다.
L : 돈 – 물질적인 것을 원하는사람에겐 금전으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편지 – 편지로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경험이 있고 편지 하나에 감정이 바뀌는 것을 느껴보았다.
진심 – 감정이 담긴 마음으로 말하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협박 – 강제적이지만 가능한 것 같다.
사랑 – 진심
사람 마음은 말 한마디로도 움직이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사람에게 힘이 되거나 필요한 말을 해서 감정적으로 큰 변화를 줄 수 있다.
7.‘꿈을 꾸는 것은 죄다.’라는 대사와 ‘꿈을 꾸는 사람이 모이면 세상이 조금 달라지지않겠느냐.’라는 대사가 나왔습니다.
꿈을 꾸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H : 영화상의 배역 조항리가 말한 ‘꿈을 꾸는 것은 죄다.’라는 대사는 조항리 입장에서 자기가 반역을 하는 것 빼고 다른이가 꿈을 꾸는 것은 안된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고, 그 말대로라면 모든 백성이 반역자로 해당되므로 터무니없는 소리이다.
‘꿈을 꾸는 사람이 모이면 세상이 조금 달라지지 않겠느냐.’라는 대사에 대해서는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영화상에서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L : 꿈을 꾸는 것이 죄라고 생각할 수 없다. 내가 옛날 시대를 살아봤다면 강제적으로는 죄가 될 수 있었겠지만
꿈은 자신만의 입장이며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꿈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꿈을 꾸는 사람이 모인다면 더 빨리 그 꿈을 실행해 갈 수 있다.
영화에서 조항리가 말했듯이 꿈을 꾸는 것이 죄가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8.우리나라 전통 놀이패놀이에 대해 적어봅시다. 그리고 놀이패를 적접 본 경험과 소감을 말해봅시다.
H : 놀이패놀이란 신이나 다른 사람의 얼굴 가면을 쓰고 음악과 대사에 맞춰 연극하는 탈춤이 있으며,
모심기, 김매기 등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힘을 내기 위해 하는, 명절이나 행사에 하는 풍물 놀이가 있다. 또 농민들이 하는 사물놀이가 있다.
L : 놀이패는 사물놀이, 풍물 등 여러가지의 전통적인 것들을 행사나 특별한 날에 하는 것이다.
직접 본 경험은 초등학생 때 풍물부에 가서 도와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보았고, 정신이 없었다.
→ 놀이패 놀이는 직업적인 놀이패 즉, 사당패, 소리꾼, 탈꾼 등 전문가에 의한 전통 민속놀이로 탈춤, 풍물 등을 들 수 있다.
탈춤은 가면으로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가리고 다른 인물, 동물 또는 초자연적 존재(신) 등으로 분장한 후
음악에 맞추어 춤과 대사로써 연극하는 것을 말한다.
신라시대에 유행한 검무, 처용무 및 신라 오기인 월전 · 금환 · 속독 · 산예 · 대면 등이 궁중무용으로 전해졌고,
이것이 고려 ·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민속무용으로 발전하였다.
현재 전승되는 탈춤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은율, 강령, 봉산 탈춤을 비롯해
양주, 송파 산대놀이 및 통영, 고성, 가산오광대와 수영, 동래들놀음 등이다.
풍물은 농촌에서 집단노동이나 명절 때 흥을 돋우기 위해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김매기 · 모심기 등의 힘든 일을 할 때 일의 능률을 올리고 피로를 덜며 협동심을 유도하는데 도움이 된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쓴 농기를 세우고, 꽹과리, 징, 북, 장구 등 타악기와 태평소 등 관악기 등을 연주하는 것으로 농악놀이, 사물놀이로도 불린다.
농악놀이는 농민들이 하는 음악이라는 의미이고, 사물놀이는 사물, 꽹과리 · 장구 · 북 · 징의 네 가지 악기 놀이라는 의미이다.
현재에도 풍물놀이는 축제, 기공식 등 각종 행사의 개막식, 폐막식, 전야제 등에 연주되고 있다.
9.감상평
H : 조선 후기의 배경을 잘 나타내주었고, 당시 나라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알 수 있었다.
농민들이 어떤 문화를 즐겼는지 뭐가 유행했는지 알 수 있는 영화였고, 현대 사회와 비교하면서도 고위층 사람들을 적절히 잘 비판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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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 영화에서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해서 사람들에게 역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 후기 사회를 쉽게 묻어나게 흥부전 스토리가 진행되어서 좋았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와 반전이 있었던 것 같다.